고통의 크기는 상대적이다.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의식과 영혼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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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물컵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과 양동이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렸을 때 두 물의 색깔은 다르다.
인간이 가지는 의식과 영혼은  모두 제각각이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가해지는 고통의 강도가 같다고 가정했을 때 자신 안에서 느껴지는 고통의 강도도 모두 다르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의 의식과 영혼을 결정짓는 것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경험은 인간이 살아오며 겪는 모든 것을 말한다. 순수하게 경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 배움의 종류와 정도 등등 자신이 원했던 것이든 아니든 그 인간이 겪은 모든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경험은 모두 제각각이고 결국 의식과 영혼은 모두 다르다. 
그래서 빅터 프랭클은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한 것일까?


어떤 고통이나 시련이 자신에게 닥쳤다고 하자. 그것이 참기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때 자신의 의식과 영혼을 의도적으로 키우려 노력한다면 그 고통의 강도가 줄어들게 되는 걸까?
깨끗한 물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졌을 때 거기에 물을 붓는다면 물에서 보이는 잉크의 색깔이 점점 옅어지게 되고 계속해서 물을 부으면 언젠가는 물에서 잉크색을 볼 수 없게 된다.
결국 자신에게 닥친 시련이나 고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더라도 의식과 영혼의 확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고통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그 고통을 이겨내려는 의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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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Life To Live.

One Life To Live
(죽음의 수용소를 읽으며...)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을 산다.
누구나 쉽게 하는 말로 인생 한번 살지 두번 사냐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 한 번 사는 인생을 고찰 해 본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각자의 삶이 일회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게도 그 삶을 살아내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책임이라는 것은 결국 살아가며 겪게 되는 수 많은 선택들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을 선택을 할지 어떻게 행동 할 지 하는것은 본인 삶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 선택들은 자신이 지나온 삶의 여정에 과거라는 고정된 결과로 남아있다.
그 과거들이 쌓여 현재 지금의 나를 만든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의 작가인 빅터 프랭클은 과거를 가리켜 행동과 기쁨 심지어는 고통까지도 구원해준 곡창 같은 곳이라고 했을지 모른다.
나의 곡창은 무엇으로 채워져있으며 지금 나는 그 곡차에 무엇을 채우기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나는 내 인생의 시간의 모래위에 어떤 불멸의 발자국을 남길것인가?
누구는 멀리서도 한눈에 보여지는 크고 아름다운 발자국을 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신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보람있게 충실히 쌓아가는 삶이야 말로 그 어떤 거대한 발자국 보다 더 의미있고 디테일이 살아있는 발자국으로 남을것이다. 그 발자국은 지금 우리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어지고 있다.
삶은 단 한번 뿐이기 때문에.
One life to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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