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경제학 - 문소영 #2


# 19세기 중반부터 예술가들과 저술가들이 노동자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문학과 예술의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정치·경제·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 자본주의를 증오한 마르크스도 그의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에 입각해서,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본주의 사회가 선행해야 하며, 자본주의 사회가 그 이전 사회보다는 발전한 상태라고 했다.

# 노동가치설은 결국 객관적 요인에 의해 상품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보는 객관가치설(objective theory of value)이다. 또한 상품이 생산될 때 그 가치가 내재된다고 보는 이론이다.

# 주관적 효용을 측정하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20세기 이후로는 가치 무용론(無用論)이 대두했다. 결국 한 상품의 가치를 무리해서 측정한다 해도 그것이 곧 가격이 될 수 없으며, 상품의 가격은 가치와 상관없이 시장의 수요·공급에 의해 결정되니, 가격과 분리된 가치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순진한 눈을 반짝거리며 자유와 평등이 함께 극대화되는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막연히 말할 때, 마르크스는 ‘그래? 구체적으로 어떻게? 방법 있어?’라고 비웃으며, 평등의 극대화를 위해서 자유를 제한하는 공산주의를 제시했던 것이다.

# 밀은 오늘날 대다수 산업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결과적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 보장’을 선구적으로 주장한 학자였다.

# 만일 교육이나 사회제도가 편안함이나 풍족함의 대가로 행동의 통제를 요구한다면, 또는 평등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인간 본성의 가장 고상한 특징 중 하나(자유에 대한 욕구)를 박탈하는 것이 되리라.

# 쿠르베의 이런 정치적 삶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볼 때 정치적, 이념적 메시지가 별로 강하지 않은 편이다. 그림에 있어서는 어떤 구호를 외치기보다 아름답든 추하든 현실을 직시하고 묘사하는 것이 쿠르베에게 하나의 이념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회주의자이며 민주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리얼리스트”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 앞서 말한 대로 마르크스도 밀도 모두 성격이 다르지만 리얼리스트였다. 이 시대는 리얼리스트가 이끈 시대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리얼리즘에서 근대성 혹은 현대성이라고 번역되는 모더니티modernity가 나왔다.

# 마네의 그림들은, 그들이 그려진 표면을 선언하는 솔직함의 미덕으로(즉 그들이 평면에 그려진 그림임을 숨기려 하지 않음으로써), 최초의 모던아트가 되었다.”

# 모리스는 오늘날 디자이너들이 기본적으로 가지는 철학, 즉 디자인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일상생활을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철학을 뚜렷하게 내세운 거의 최초의 인물이었다.

# 스미스는 Part 6에서 언급한 것처럼 분업이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와 사회 전체의 부를 증진하고 그 경우 노동자들의 절대적 부도 증가한다고 했지만, 노동자들이 단순 작업만 반복하다가 무지와 무기력에 빠질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스미스는 대안으로 공공 교육을 제시했었다.

# 모리스는 후에 유명한 강연 ‘장식예술The Decorative Arts’(1877)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용해야 하는 것들에서 기쁨을 얻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장식예술의 한 중요한 직무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만들어야 하는 것들에서 기쁨을 얻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장식예술의 또 다른 직무다. … 장식예술이 없다면 우리의 남은 세상은 공허하고 아무런 재미가 없을 것이고, 우리의 노동은 그저 견디는 것, 그저 몸과 마음을 소모하는 것이 될 것이다.

# 1919년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모리스로부터 계승한 것은 디자인 스타일이 아니라 디자인의 근본적인 철학이었다. 그것은 제품의 형태가 기능적 목적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디자인이 예술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각 분야의 디자인이 그들을 관통하는 일관성을 지니면서 사용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 그로피우스는 모리스의 디자인 철학을 이어받으면서 그 모순점도 간파했다. 모리스는 대중과 사회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 했지만 대량생산을 거부함으로써 제품을 대중이 쓸 수 있는 싼 가격에 공급할 수 없었던 것 말이다. 그로피우스는 결국 기계적 대량생산이 디자인의 선결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기본적으로 대량생산을 위한 디자인, 공업과 연계된 디자인을 추구하도록 했다.

# 바우하우스는 모리스의 ‘사회를 위한 장식예술’ 정신을 이어받으면서, 모리스와 달리 새로운 시대의 생산방식과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모순점을 극복하고 한 세기 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 아르누보는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가 일으킨 미술 공예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틀에 박힌 양식과 대량생산을 거부하고 자연 속의 갖가지 형태를 꼼꼼히 관찰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디자인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 아르누보는 또한 일본의 대중 회화 우키요에浮世繪의 명쾌한 선묘에서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후반 유럽 미술에 우키요에 목판화가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클로드 모네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 그리고 그 이후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같은 중요한 화가들이 모두 우키요에의 독특한 선묘와 면 분할, 대담한 색채 대비, 일상의 섬세한 찰나 포착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

# 이렇게 광고가 표명하는 소비의 민주화와 자유는 시장경제의 매력이다. 그런데 동시에 함정일 수도 있다.
영국의 미술평론가 존 버거John Berger, 1926~는 저서 『보는 방법Ways of Seeing』(1972)에서 현대의 광고들이 누누이 강조하는 ‘선택의 자유’를 비판한다. 기껏해야 기업체가 생산하는 상품 중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고르는 자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광고는 오로지 한 가지 메시지, 즉 무엇인가를 사야만 삶이 더 나아지고, 구매력만이 삶의 능력이라는 메시지로 사람들을 구속한다는 게 버거의 주장이다.

# 캐나다 출신 미국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1908~2006는 근본적으로 현대인의 소비 결정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의지에 의한 것인지 묻는다. 그의 저서 『풍요로운 사회The Affluent Society』(1958)와 『새로운 산업국가The New Industrial State』(1967)에 따르면, 미국의 성장지상주의에 따라 생산력이 극대화된 기업들이 이제 그 생산물을 팔아야 하는 고민에 빠진다. 그래서 기업들은 수요를 끌어 올리기 위해 소비자의 사고방식과 욕구를 마음대로 주무르려 한다는 것이다.
“구매자에게서 의사결정 능력을 빼앗아 그 능력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는 기업에 넘기는 것이다.”

# 갤브레이스에 따르면, 이 조작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광고다. 광고가 마치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에 부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기업들의 존속을 위해, (원래 있지도 않던) 다양한 욕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광고를 통해서 기업들은 사회의 목표를 기업의 이익 쪽으로 유도하고, 기업의 목표를 사회 전체의 목표로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비자의 자유와 주권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게 갤브레이스의 생각이다.

# 여하튼 버거와 갤브레이스를 관통하는 한 가지 생각이 있다. 그것은 광고가 ‘소비하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발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있다 이야기할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와 연관된다.

# 예술적인 광고일수록 그 제품의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기보다 어떤 선망의 이미지만 구축하는 것이다.

# 이런 광고가 무하의 시대부터 현대까지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는,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만 상품을 사는 게 아니라, 그 상품을 가졌을 때 타인에게 비치는 이미지를 의식해서 소비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행에 따라 소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또 소비를 통해 자신의 능력이나 지위를 과시하고 싶어 한다.

# 그들(약탈하는 자들)은 약탈 능력의 대가로 땀 흘려 노동할 필요가 없이 여가를 즐기는 유한계급이 되었다. 그런데 과거에는 약탈 능력이 잘 드러났기 때문에 유한계급이 쉽게 경외감의 대상이 되었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게 감추어져 있어서 유한계급은 과시적 소비를 통해 경외감의 대상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는 어떤 상품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사면 그 상품에 대한 자신의 독립적인 선호도와 상관없이 무조건 따라 사는 현상을 말한다. 스놉 효과snob effect는 반대로 어떤 상품에 사람이 많이 몰리면 차별화를 위해서 일부러 다른 상품을 구매하는 현상을 말한다.
또 베블런 효과는 부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고자 하는 소비자에 의해, 특정 상품의 가격이 오를수록 오히려 소비가 늘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 20세기에 더욱 현란해진 광고를 경험한 갤브레이스는 한술 더 떠 소비재 광고를 아예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앞서 말한 대로 생산력 과잉이 된 기업들이 수요를 끌어 올리기 위해 소비자의 욕구를 조종하려 한다고 보았다. 그는 “광고의 핵심 기능은 욕구의 창조에 있다”고 했다.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필요와 상대적인 욕구가 있는데, 광고는 광고를 보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욕망을 일으켜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의존 효과dependence effect’라고 불렀다.

# 열등재라고 해도 대개는 그 가격이 하락하면 그 수요가 증가한다. 왜냐하면 소득효과는 마이너스지만, 대체효과는 열등재건 정상재건 무조건 가격 하락에 대해 플러스인데, 그런 대체효과가 소득효과를 상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 소득효과가 대체효과를 능가하는 경우가 있다

# 베블런재는 대체효과와 소득효과로 설명되지 않는다. 베블런재는 심리와 문화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다. 반면에 기펜재( 대기근 상황에서 감자와 같은 것 )는 가격과 소득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도 기펜재는 값싼 식량 같은 특수한 필수재인 것에 반해, 베블런재는 사치품이다.

# 전에도 경기침체가 있었지만 이렇게 대공황이 된 건 처음이었는데,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경제학자와 역사학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견해가 통일돼 있지 않다. 주가 폭락, 투자 축소, 소비 위축, 생산 감소, 실업 증가, 기업과 은행 파산 등 여러 악재가 뚜렷한 상관관계correlation를 보이며 함께 터졌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 인과관계causality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 것이다.

# 대공황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소비와 투자를 아우르는 총수요aggregate demand의 감소로 생산과잉이 발생한 상황에서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의 금융 긴축 정책이 겹치면서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았다는 것에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 중 어느 것이 주요 원인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다.

#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는 본래 군사용어로, 전투에서 선봉에 서는 부대를 가리킨다. 이것이 예술에 적용될 때는, 예술에 대한 기존 인식과 가치 체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예술 개념을 내놓는 혁명적 경향 및 운동을 가리킨다. 미술에서는 대개 상징주의, 미래파, 입체파, 다다이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추상미술 등이 아방가르드 아트로 거론된다.

# 프로젝트가 미술가의 자유와 창의성을 빼앗아버리는 무용지물이라는 비난도 일어났다. 전위적인 작품이 배제됐기 때문에 사실 뉴딜 벽화는 후에 미국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특별히 괄목한 작품을 남기지도 못했다.

# 이렇듯 시장에 맡기느냐, 정부가 개입하느냐의 문제는 경제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예술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시장과 정부의 지원은 양쪽 다 예술의 순수성에 위험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들이 없으면 예술이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의 영원한 딜레마로 남을 것이다.

# 경제가 호황(boom)과 불황(recession) 국면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경기순환(business cycle)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순환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주기가 일정하고 예측 가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경기순환보다 경기 변동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현실에서는 국내총생산이 장기 추세선 주위에서 더 높아지기도 하고(호황) 낮아지기도 하는(불황) 일이 반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 순수한 미술을 주장했던 말레비치는 러시아에서 서글픈 최후를 마쳤고, 순수한 미술의 대표로 꼽히는 폴록의 추상표현주의는 이렇게 정치적 음모설에 휩싸여 있다. 독립과 순수성을 갈망하지만 정치경제 상황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또한 예술의 운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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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경제학 - 문소영 #1

 





# 16세기에 이르자 상업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자금에 대한 수요는 자꾸 증가하는데, 돈줄은 유대인이 틀어쥔 상황이 종종 나타나게 됐다. 『베니스의 상인』은 이런 상황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 중상주의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천연자원과 노동력을 헐값에 제공해야 했던 식민지 주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의 서민들 또한 중상주의의 폐해를 겪어야 했다. 제조업의 경쟁력을 위해 낮은 임금을 강요받았고, 반면에 물건을 살 때는 경쟁이 없이 독점적으로 공급되는 상품을 비싼 값에 사야 했다. 중상주의가 추구한 국가의 부는 결코 일반 국민의 부가 아니었다

# 어떤 물건에 대한 전문적인 정보 없이, 그 물건의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고찰 없이, 단지 그 물건이 지금까지 값이 올랐기 때문에 앞으로도 오르리라는 기대로 그 물건을 사는 것을 보통 투기라고 한다.

# 매케이는 합리적이고 현명한 개인도 집단행동에 가담하면서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보았다

# 투기가 장기적 미래소득에 대한 확신 없이 오히려 불확실성을 이용해 일종의 모험적 매매를 해 일시적 차익만을 노리는 행위인 데 반해, 투자는 장기적이거나 규칙적인 미래소득에 대한 합리적인 기대를 바탕으로 한 행위라는 것이다

#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자연과 세계가 기계적 법칙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그 법칙의 진실은 결코 신만이 아실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인간 본성을 포함한 자연의 법칙을 파악함으로써 개인과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 부가가치: ‘산출액-중간투입액(원료비)=총부가가치’다. 여기에는 제조에 필요한 기구나 기계가 닳는 것, 즉 ‘고정자본소모’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 이것까지 고려하면 ‘산출액-중간투입액-고정자본소모=순부가가치’다. 국내총생산은 국내에서 발생한 총부가가치의 합을 말한다

# 이처럼 유기적으로 변하는 현실 경제 상황 속에서 특정 경제 사상도 힘을 얻었다 잃었다를 반복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역사에서 경제의 큰 흐름을 읽을수 있어야 한다

# 비릴리오의 이론에 특히 영감을 준 것은 중국의 고전 군사학서 『손자병법孫子兵法』(BC 5~6세기 추정)이었다. 손자의 유명한 경구 중 하나가 이것 아닌가.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잡아먹는 법이다.” 비릴리오에 따르면, 인류 역사의 각종 전쟁·봉기·혁명은 이동의 자유와 속도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고 투쟁하는 과정이며, 그래서 가속화와 함께 실질적인 공간과 권력이 재편되는 과정이다. 그에게 있어서 산업혁명 또한 폭발적인 가속화의 사건이었다.

#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차와 증기선 등으로 인한 운송 속도의 혁명과, 공장 기계 도입으로 인한 생산 속도의 혁명뿐만 아니라 분업으로 시간을 절약하는 데 따른 속도의 혁명까지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

# 이런 자유주의적 고전파 경제학은 산업혁명으로 성장한 신흥 산업자본가들에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이 기존의 지배층인 귀족과 지주 계급을 압도하면서, 중상주의적 보호와 통제 정책이 무너지고 자유방임주의와 자유무역 정책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계급이 사회의 중요한 두 축을 형성하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한다.

# "문명사회에서는 사회가 어느 정도 지위나 재산이 있는 사람들보다 일반인의 교육에 더 많은 배려를 해야 한다. 전체 국민에게 기본 교육이 가능하게 해야 하고 장려해야 하며 나아가 의무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 애덤 스미스 '국부론' 에서.

# 인상주의 미술과 산업혁명에 의한 근대 자본주의는 이처럼 기본적으로 끈끈한 관계였다는 것을 여기에서 짚고 가겠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미술사에서 혁명을 이룩했고, 아카데미 화가들의 진부한 그림들을 비판했고, 그런 그림들로 저택을 정성껏 장식한 부르주아지를 비웃었지만, 그들 역시 또 다른 부르주아 계급의 지지에 의해 성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상주의 미술은 그 속도와 역동성의 면에서 산업혁명이 탄생시킨 자본주의 문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 시장은 수급의 균형을 이루며 경제주체들의 상충된 이해관계를 지속적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손’이 이루는 조화다.

# 지금 이 글에서 시민계급과 부르주아지라는 말이 혼용되고 있는데, 그 둘은 같은 뜻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는 ‘시민계급’이라고 할 때는 진보적인 혁명의 주체를 떠올리는 반면 ‘부르주아지’라고 하면 반혁명적인 기득권층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19세기 부르주아지가 지닌 두 얼굴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는 프랑스에선 정치혁명을, 영국에선 산업혁명을 주도하면서 낡은 신분 제도의 구속에 항거해 개인의 자유와 기본 인권, 민주주의를 최초로 폭넓게 전파했다.

# 19세기가 흐르면서 혁명의 주체였던 부르주아지는 점차 반혁명적 기득권층으로 변했다.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두 얼굴은 점점 화려해지는 그들의 초상화들에서, 그리고 혁명을 다루면서도 엘리트 취향으로 가득한 역사화들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 밀레가 비현실적인 감상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이 오늘날까지 힘을 갖는 이유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농민의 가난하고 고된 생활을 현실 그대로, 그러나 참담한 심정이나 울분 대신 농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연에 대한 서정, 종교적인 경건함을 담아서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는 이 작품에서 시적인 아름다움과 평화를 느낀다. 이것이 밀레가 사실주의 화가이면서도 낭만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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