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가면 - 브레네 브라운 #1


# ‘마음가면을 벗고 취약성을 드러내는 순간,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 취약성은 성패를 미리 알 수 없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가 모두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취약성이란 참여하는 것이다. 마음가면을 벗고 온몸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 사회복지학 학사과정, 석사과정, 박사과정을 순서대로 거치면서 내가 얻은 확실한 교훈이 하나 있다. 이어짐connection(요즘은 connection을 ‘연결’로도 많이 옮기지만 이 책에서는 ‘이어짐’으로 풀어 썼다. ‘이어진 느낌’은 ‘유대감’과 같은 뜻이다-옮긴이)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 사람에게는 타인과 이어지려는 본능이 있다. 관계는 우리 삶에 목표와 의미를 부여한다. 타인과 이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받는다.

# 사람은 현재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것을 기준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감정적인 경험과 관련해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 ‘온 마음을 다하는 삶’이란 자신의 가치를 토대로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용기와 공감 능력을 지니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아침에 눈뜰 때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든, 미처 못 해낸 일이 얼마나 많든 나를 긍정해주는 것이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 나는 불완전하고 취약한 존재야. 때로는 뭔가를 두려워하기도 하지. 그래도 나는 용감한 사람이야. 나는 사랑받고 어딘가에 소속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 부모로서 불완전했던 순간들은 오히려 선물이 될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내고 다음번에 더 잘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다. 우리의 지상과제는 완벽한 부모라는 가면을 쓰고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과 나중에 아이들이 용감하고 적극적인 어른으로 자라는 것은 다른 문제다.

#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려면 마음가면을 벗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자면 세상에 대담하게 뛰어들어야 한다. 기꺼이 취약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여정의 첫걸음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에 도전하려 하는지, 목적지는 어디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 우리에게 더 큰 도움이 되는 행동은 ‘취약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문제의 패턴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예컨대 취약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나르시시즘을 바라보면 수치심에서 비롯된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보인다.

# ‘네가 부족해서 그래’ 문화에 대항하는 방법은 풍요롭게 사는 것이 아니다. ‘늘 뭔가 부족하다’의 반대말은 ‘풍요롭다’도 아니고 ‘무한정 많다’도 아니다. 부족함의 반대말은 ‘충분함’이다. 나는 충분함 대신 ‘온 마음을 다함Wholeheartedness’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이를 달성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핵심이 바로 취약해지기와 자아 존중하기다.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더라도 감정을 드러내는 것. 지금의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 취약성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취약하다는 것은 이른바 ‘어두운 감정’은 아니지만 마냥 가볍고 긍정적인 경험도 아니다. 취약성은 모든 감정과 느낌의 핵이다.

# 내가 10년간의 연구를 통해 알아낸 바에 따르면, 취약성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감정과 경험들의 요람이다. 취약성은 사랑, 소속감, 기쁨, 용기, 공감, 창의력의 원천이며 희망과 공감, 책임감과 진정성을 잉태한다. 삶의 목표를 더 분명히 하고 싶다면, 정신세계를 더 심오하고 의미 있게 만들고 싶다면 취약성에 그 답이 있다.

# 우리의 작품, 우리의 글, 우리의 사진, 우리의 아이디어를 세상에 내놓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보장도 없고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리라는 확신도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취약해진다. 순간의 행복에 취하는 일은 또 어떤가? 행복한 순간은 덧없이 흘러가버린다는 사실을 우리도 안다. 재난을 부르고 싶지 않다면 너무 행복해하지 말라고 세상이 우리에게 충고한다. 순간의 행복에 취한다는 것은 짧지만 강렬한 취약성이다.

# 삶에 반드시 필요한 감정의 영역을 되찾고 열정과 목표의식에 불을 붙이고 싶다면 자신의 취약성을 끌어안고 취약한 상태 그대로 세상에 참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삶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모든 걸 걸고 있나요? 남들의 취약성을 높이 평가하는 만큼 당신의 취약성도 소중히 여길 수 있나요?”

여기서 ‘예’라고 대답하는 것은 나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측량 불가능한 용기다. 대담하게 뛰어드는 행동이다. 사실 대담하게 뛰어들기의 결과는 승리의 행진이 아닐 때가 많다. 하지만 대개는 격렬한 전투 끝의 피로감과 함께 조용한 자유가 찾아온다.

#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 속에 촘촘히 박혀 있는 불확실성, 위험, 감정 노출을 선택적으로 피해갈 수가 없다. 삶 자체가 취약한 것이다

# 취약성을 최대한 피하려고 애쓰다 보면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들을 하게 된다. 취약성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불확실하고 위험하고 감정이 노출되는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 취약해진다는 것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감정과 경험을 털어놓는 것이다. 취약성을 끌어안고 솔직해진다는 것은 신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으로 대개는 쌍방향으로 이뤄진다.

# 우리가 정상적으로 뭔가를 털어놓는 대상은 그런 이야기를 들려줘도 괜찮을 정도의 관계를 쌓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를 존중하는 취약성은 관계를 더 깊게 만들고, 신뢰를 쌓고, 진정 어린 참여를 이끌어낸다. 경계 없는 취약성은 관계를 끊고, 불신을 조장하고, 참여를 저조하게 만든다.

#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의 강인함을 높이 평가한다. 현대사회는 혼자 뭔가를 해내는 사람을 숭상한다. 하지만 취약성을 탐구하는 여행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취약성과 친해지려면 주위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우리를 쉽게 비판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존재방식을 연습하도록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 수치심에 관해 이야기하는 순간 수치심은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마치 그렘린들이 빛에 노출되기만 해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것처럼, 언어와 이야기는 수치심에 환한 빛을 비춰서 수치심을 제거한다.

#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면 취약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거네요? 취약해지기 위해서는 수치심 회복탄력성을 길러야 하고요.”

# 당신이 어떤 상품을 디자인했거나 기사를 썼거나 예술작품을 만들었다고 해보자. 당신이 만든 뭔가를 공유한다는 것은 취약해지는 일이지만 세상에 참여하고 ‘온 마음을 다하며’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대담하게 뛰어들기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신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당신의 가치를 당신의 창작물이나 작품에 대한 세상의 평가와 동일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당신이 세상에 접근하는 방식 때문일 수도 있다.

# “혁신을 죽이는 비밀병기는 수치심입니다. 수치로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죠. 누군가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말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상사에게 꼭 필요한 피드백을 주지 못하거나, 고객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게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모두 수치심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틀리면 어쩌나, 망신당하면 어쩌나, 위축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있는데, 바로 그 불안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조직이 전진하는 데 꼭 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지금 난 속상해. 실망스럽고 큰 타격을 받은 것 같기도 하네. 하지만 나는 성공과 명성과 인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아. 나는 용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용감하게 행동했을 뿐이야. 수치심아, 그만 가보렴.”

# 마지막 원칙은 수치심에 관한 이야기를 회피하면 할수록 수치심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 죄책감은 수치심과 똑같이 강렬한 감정이지만 우리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반면 수치심은 우리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다. 나의 연구에서도 수치심은 자신이 변화할 수 있고 더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잠식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 존이라는 사람이 동료 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는데 그가 영업에서 판매를 성사시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상사가 존에게 ‘루저’라고 했다고 가정해보자. 존은 그 상황을 수치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고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만약 존이 자신에게 “아, 이런, 이런. 난 루저구나. 난 패배자야.”라고 말한다면 그는 수치심을 느낀 것이다. 만약 존이 자신에게 “허 참, 저분이 자제력을 잃으셨네. 그래도 그렇지.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어.”라고 말한다면 그는 모욕을 느낀 것이다. 모욕은 매우 기분 나쁜 감정이며 일이나 가정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모욕을 느끼는 상황이 되풀이될 경우 우리는 그 메시지를 내면화하기 시작하고 모욕감은 서서히 수치심으로 변해간다. 그래도 모욕은 수치심보다 낫다. 존은 ‘루저’라는 상사의 발언을 내면화하지 않고 자신에게 “저건 저 사람의 문제야.”라는 말을 들려줬다.

# 수치심 회복탄력성은 수치심에서 공감으로 옮겨가는 힘이다. 공감은 수치심을 치료하는 약과 같다.

# 자기 자신을 향한 공감은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가 수치심의 한가운데서 자기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서 도움을 청하고 공감을 경험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다.

# “나의 과거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미래의 모습이 나를 규정한다.” - 칼 융

# 수치심은 우리가 그것을 비밀로 간직할 때 더욱 왕성하게 활동한다.

# 일찍부터 비밀 유지의 효과에 관해 연구해온 펜베이커 박사는 글쓰기의 치유력을 중시한다. 그는 《치유하는 글쓰기Writing to Heal》라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연구자들은 치유의 수단으로서 글쓰기가 지닌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트라우마가 된 경험에 관해 3~4일 연속으로 하루 15분에서 20분 동안 글을 쓰면 육체적·정신적 건강상태에 측정 가능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증거가 쌓이고 있다. 감정을 담아내는 글쓰기는 수면, 업무효율, 대인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끼친다.’

# 여자다움에 관한 사회적 규범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 규범들은 환원주의적이고 우리에게서 진정한 삶을 앗아간다. 그 규범들을 강제하는 통로가 바로 수치심이다. 수치심 회복탄력성이 취약성을 끌어안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수치심 회복이란 중용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중용의 길을 택하면 우리는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는 데 필요한 용기를 얻을 수 있다.

# 우리가 대담하게 세상에 뛰어들고 서로에게 취약해진다면 자존감이 힘을 발휘해 우리 모두를 한층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 ‘네가 부족해서 그래’의 반대말은 ‘나는 충분해’다. 무언가 부족한 느낌의 속성은 곧 수치심·비교·놓아버리기다. 그렇다면 나는 충분하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갑옷을 벗는 방법이 아닐까? 충분하다는 말에는 자존·경계·참여의 의미가 포함된다. 연구 참가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찾아낸 모든 갑옷 벗기 전략의 핵심에는 충분이라는 의미가 존재한다.

# 아무리 운이 좋더라도 의구심과 두려움과 주저하는 마음 없이 취약성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불확실성과 위험과 감정 노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갑옷을 입고 살다가 어떤 계기로 그것을 벗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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